용서한다는 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죄책감의 실체는 과거로부터 온다. 그러나 나는 과거에 살지 않는다. 그저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에고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기억한다. 사랑이 더 강하고 미움이 더 약한데 분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누구를 사랑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은 이상한 사랑이다. 사람들의 가슴속엔 언제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행복, 기쁨에 대한 열망이 있다. 용서받고 싶다면 용서라라라는 말씀이 나에게 들린다. 용서는 남들보다 너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다. 나의 에고를 다 버리기 전에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여전히 물러나지 않으신다 얼마나 행복한 진실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언제든 되돌리신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상황들은 대부분은 자신의 제한신념에서 온다.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서 괴롭다. 원치않는 일을 뜻밖의 결과라고 바꿔 말해 준다면 좀 더 행복할 수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일들이 주님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면 어떤 괴로움도 견딜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내가 어디로 가든 내가 갈 길로 발길을 인도하신다. 나무가 해를 보고 뻗어 가듯 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괴로운 것은 에고가 있고, 강한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모든 면에서 부딪히기 때문에…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에고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움에 대한 저항감을 유발한다. 에고와 에고의 공격, 충돌, 저항, 장엄함이라는 착각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를 인식하는 기반은 에고이다. 에고는 각자 스스로는 어떠하다는 설정값에 빠져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나는 고요한 것이 좋다. 사람이 좋다. 정직하다. 등등 하지만 정직하지도, 법없이도 고요한 것만 좋아히지도,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런 말들은 자신의 에고가 다른 사람의 에고에 비치고 싶은 강한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에고의 설정값이다. 그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든 우선 용서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다.
극단적으로, 부부 관계, 연인 관계에서 바람난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가 나에게 다시 같이 살자고 할 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안아줄 수 있을까?
내 에고는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셨다. 그냥 그렇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바라봐 준다. 주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