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마음의 힘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에고는 몸을 나로 해석하기 때문에 나는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몸은 오직 소통의 수단이다. 육체를 나로 생각하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외모는 외부와 소통의 수단이다.
상실→ 형제를 육체로 대할 때 상실을 경험한다. 내가 상실을 경험하는 이유는 형제를 육체로 대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기능에 기여하는 것만이 실재임을 알고 있다. 나는 어떠한 상실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나와 모든 것을 공유하심으로 나는 어떠한 상실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결국 내가 육체의 눈으로 생각하는 모든것은 내가 갖고자 하는 내 앞에 나타난 모든 사물들이라고 한정되어 있다.
오늘 내게 필요하다면 그냥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무한하게 갖고 나와 공유하신다.
나의 마음이 자신을 비하하게 하지 말고 못났다. 없다, 부족하다. 필요하다는 많은 생각과 말들로부터 벗어나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각은 실재로 나타나게 되어, 즉 나의 생각은 실재로 나타나게 되어라는 엄청난 뜻을 내포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믿음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열매를 가져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생각은 실재가 되어, 나의 생각은 실재가 되어,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나에게 공유하시고, 내게 주신 창조성은 실재가 되어 나에게 나타나게 된다. 마음은 몸을 통해 드러나 = 생각은 실재가 되어=말씀은 육신이 되어 = 통합된 목표는 몸은 마음의 표현되는 도구이니 = 모든 마음(생각은 몸을 통해 실재로 형상이 되어 현실로 나오며 → 이 세상에 주어진 학습목표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이 어마어마한 진리는 하나님과 소통했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알려주고싶어했던 것 아닌가? 하나님은 요즘 나를 새벽 4시에 부르신다. 성령은 신기하시다. 어떤 사건을 통해 내가 매일 5시간이나 티브이를 켜놓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나의 몸은 성령과 소통하는 도구이다.
배울 수없는 과제, 너무 어려운 과제를 대면하는 것 같은 감정은 우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견딜만한, 자신이 이길만한 범위 안에서의 육체적 체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늘 내가 견딜만한 육체적 체험은 어떤 것인가?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고 하는 생각은 견딜만한 육체적 체험을 허락하신다는 뜻으로 그것이 비록 에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란 것이다.
몸 안에서와 몸을 통해라는 말의 뜻
몸 안에서 마음이 일한다 → 몸이 주인이다. 몸을 통해 일한다→ 마음이 주인이다.
마음이 몸을 목표로 하다.→ 마음이 에고에게 휘둘린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에고의 욕구를 거스른다. 몸은 그저 소통의 도구이다.
몸을 하나님께 넘겨줘야 한다. 몸은 학습도구일 뿐 배움은 마음의 힘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한다.
이런 것을 모르면 육체는 좀비 상태로 있는 것이다. 집단 무의식은 집단 좀비상태 사실 세상은 이런 미치광이 형태로 생겨 돌아가고 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오실 당시나 지금이나 몸과 마음의 분리된 상태의 사람들은 그대로 유지된다. 오직 아주아주 극소수 사람들 만이 자신이 좀비로 살고 있는 상태에서 겨우 깨어난다.
나의 생각을 이 세상에 가두지 말라. 그리하면 나의 생각이 하나님 안에서 창조하게 한다.